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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생책 추천, 마음이 헛헛할 때 보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

by 루나디아 2023. 2. 20.

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할 때가 있다. 딱히 삶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는데 왜인지 내 마음은 편안하지가 않다. 밖에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단조롭고 평안한 삶인데, 심연은 그렇지 못하다. 때로는 이런 마음의 변화조차 배 부른 헛소리로 보일까 봐 누구에게도 꺼내놓을 수 없는 그런 시기가 온다. 

내겐 그 시기가 자주 오는 편이다. 써놓고 보니 '자주'라는 건 개인적인 판단이라 비교급으로 쓰기가 애매모호한다. 3개월에 한번씩이랄까? 끼워놓고 잊어버려도 언제나처럼 잘 가는 시계의 배터리처럼 내 마음의 속도와 방향과 진동도 일정하면 좋겠다. 그런데 3개월이면 한 번씩 교체해 줘야 하는 정수기 필터 같다. 계속 쓰던 필터로 거른 물을 마시면 몸에 안 좋은 것처럼 마음을 돌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몸이 아프다.

이럴 때 새로운 필터가 되는 것이 내겐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'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' 책이다. 

인생책 추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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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책 소개

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서 35편을 엄선해 묶었다. 2020년 12월 7일 초판 1쇄가 발행되었고, A5 사이즈에 총 286페이지로 그리 두껍지 않다. 책 프롤로그는 돌아가신 분이 쓰실 수 없으니, 그 분의 딸 호원숙 님이 맡았다. 참고로 호원숙 님도 수필가다.

목차는 마음이 낸 길 / 꿈을 꿀 희망 /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 / 사랑의 행로 / 환하고도 슬픈 얼굴 / 이왕이면 해피엔드 총 6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. 

 

박완서 작가 소개

1931년 생을 경기도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가기 전 홀어머니, 오빠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.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6.25로 학업을 중단했다고 한다. 1953년 결혼해 1남 4녀을 두었다. 이 책을 낸 호원숙 작가님이 맏이다. 1931년에 태어나 1970년에 등단했으니 불혹의 늦은 나이로 문단에 데뷔를 했다. 그리고 담낭암으로 타계하기까지 40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을 남겼으며 내가 선정한 대표작으로 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, 친절한 복희씨,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등이 있다.  

 

인생책 추천 이유

"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 있다.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.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.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,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." -p.128

"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,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,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" -p.257

작가님의 삶에는 전쟁과 어린 아들의 부재가 있다. 짧은 한 줄에도 쉽지 않은 인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. 모두의 인생에는 파동이 있지만 많은 이들이 경험하지 않는 그런 상흔이 인생 그래프에 남아있다. 그럼에도 늘 희망을 이야기 한다. 그리고 무엇보다 어렵지 않다. 책엔 중간중간 그림도 포함되어 있는데 예전에 쓴 글에 요즘 감성의 일러스트 조합이 흥미롭다. 

몇 년 전부터는 흥미로운 제목의 에세이가 서점가를 말 그대로 강타했다.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부터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.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등, 제목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유추가 가능한 그런 책들이다. 혼란한 시대에 살면서 나도 모르는 내 기분과 상태를 정리해 주는 듯한 책들은 때로는 그래도 된다고 사이다 같은 위로를 해 줬고, 때로는 그러지 말라며 쓴 약 같은 충고도 해주었다. 이에 비해 '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'는 사이다스럽지는 않다. 죽이나 누룽지에 가깝다. 

피곤할 때, 컨디션이 나쁠 때, 속이 불편할 때 엄마가 끓여주던 뭉근한 한 끼 식사. 목에 걸린 것들을 쑤욱 내려가게 하는 시원함은 없지만 내 몸을 되살려주는 그런 따뜻함이 있다. 

2021년도에 읽었던 것을 2023년 2월에도 읽고 있다. 챗GPT가 모든 물음에 대답해 주는 이 시대에 2011년에 작고한 작가님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일 수 있다. 그런데 이런 시대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세공하듯 잘 갈고닦아 놓은 문장들이 더욱 와닿는다.